다른 사람들이 쉴 때 일하고, 남보다 늦게 퇴근합니다. 하지만 어느새 9년 차 중식 조리사인 그에게 이런 불편은 숙명이 된 지 오래죠. SK네트웍스 워커힐 이산호 요리사는 중식 요리사로서 세계적인 쉐프를 꿈꿉니다. 하지만 오늘 그가 들려줄 꿈 이야기는 그것보다 조금 더 특별합니다.
춤, 노래, 랩으로 행복을 주던 사람
1997년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이산호 요리사의 꿈은 가수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요리를 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누가 뭐래도 ‘가수가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학교 끝나면 바로 친구들과 춤∙노래를 연습했어요. 학교에서 장기자랑, 수련회 같은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무대에 섰죠. 지금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믿지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춤∙노래∙랩을 꽤 잘했거든요. 잘하는 걸 보여줄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저를 보고 환호하고 손뼉 치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흐뭇한 모습에 행복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로 남을 즐겁게 하고, 결국은 내가 더 행복해지는 일. 그래서 가수는 당연히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죠.
처음 맛본 인생의 쓴맛, 그리고 새로운 꿈
하나밖에 없던 꿈이 좌절되고 때마침 IMF가 터졌습니다. 집안 사정이 힘들어져서 어떤 일이든 시작해야 했죠. 그때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꿈이 찾아왔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라면을 끓여드린 적이 있어요. 뭔가 해드려야겠는데 아는 레시피는 없고… 라면은 몇 도에 몇 분을 끓이라고 뒤에 적혀있어서 하게 된 거죠. 어머니께서 드시고는 정말 맛있다, 아픈 거 다 나았다, 우리 아들 대견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무척 좋아하셨어요. 그때 우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누군가에게 음식을 해주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요리로 행복을 주는 사람
첫 주방은 건설현장 식당이었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설거지와 보조 일을 하며 반년 넘게 그저 묵묵하게, 성실히 일했어요.
건설현장 직원 한 분이 ‘학생 열심히 하는데 내가 아는 곳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하고 소개해주셔서 갔던 곳이 한 호텔 주방이었어요. 고무장갑 끼고 고무장화 신고 일하던 저에게 호텔 주방은 하얀 모자, 조리복, 많은 사람까지… 모든 게 동경의 대상이었죠. 그때 호텔 요리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바로 대학을 가고, 군대를 다녀오고, 이곳 워커힐 호텔로 실습을 지원했어요. 워커힐은 어릴 때 가족들과 디너쇼를 보러 왔던 추억이 있고, 또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나라 최고의 호텔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에게는 꿈의 주방이었습니다.
워커힐 실습생 시절,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잘 때도 실습생 명찰을 목에 걸고 자던 이산호 요리사. 결국, 꿈꾸던 주방에 들어섰고, 어느새 워커힐 9년 차 조리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중국요리, 어렵지 않아요~
2013년 4월 ‘워커힐 조리경연대회’ 출품작
보통 요리사는 집에서 요리를 잘 안 한다지만, 저는 집에서도 잘 해먹는 편인데요. 1년 전 어느 날 아내가 혼자 보고 먹기 아깝다며 ‘집에서 쉽게 만드는 중식 요리법’을 유튜브에 올리자고 하더군요. 중식은 만들기 어렵다는 편견도 있고, 양식∙한식에 비해 인터넷에 자료도 적어요. 중식에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이 될까 해서 큰 기대 없이 시작했죠. 하다 보니 캐나다 교민분께 고맙다는 메일을 받기도 하고, 영상을 보신 분들이 피드백도 해주세요. 덕분에 그동안 올린 영상의 누적 조회 수도 2만 건이 넘었습니다. 매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수에서 호텔 조리사로, 그리고 이제는 중국요리 전도사로! 이산호 요리사가 써내려 가는 끊임없는 도전기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좋아하던 사람들의 모습,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줬을 때 맛있게 먹는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행복하다는 게 공통점인 것 같아요. 저 때문에 누군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함께 행복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