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세 개의 성별이 있다는 우스개,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줌마지요. 어떻게 보면 썩 좋은 뜻은 아닌데 곽순학 님은 이 말에 몹시 긍정했습니다. 아줌마는 험난한 세상 속에서 가정을 보듬는 ‘특별한 직업’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악보’를 펼친 덕분이었습니다.
악보가 펼쳐준 새로운 세상
서른아홉 무렵 제가 사는 시에서 운영하는 여성합창단에 들어갔어요. 어릴 때 음악 시간만 되면 풍금 한 번 만져보려고 달려가곤 했는데, 절친한 동창이 그걸 기억하고선 합창단 단원 모집할 때 나 몰래 원서를 넣었대요. 그게 벌써 17년 전이네요.
연습시간마다 ‘이 시간만큼은 내 시간이다.’ 싶은 게 참 좋더군요. 개구리 헤엄치듯 우물 안에만 있다가, 악보를 받아 탁 펼치는 순간 새로운 세상도 함께 펼쳐진 거죠. 친구도 생기고 많이 배우고. 취미가 일이 되니까 사회적 소속감도 생겼어요. 며칠 전에는 소박하지만 열일곱 번째 연주회도 열었답니다.
반짝반짝 젊음의 비결
1년에 한 번씩 무대에 서서 노래할 때 정말 좋아요. 그런 걸 ‘희열’이라고 한다죠? 제가 봐도 그날은 제가 꽤 예뻐요. 눈이 반짝반짝하고 이 나이에 이 정도면 비율도 괜찮은 것 같고, 드레스 입으면 목선도 살아 있어요. 무대에 서면 사람들이 정말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하면 우리 딸이 그래요. 그걸 요즘 말로 ‘자뻑’이라 한다고. 깔깔.
그런데 그게 동안 비결 아닌가 싶어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말 가끔 듣는데, 드레스 입으려면 은근히 긴장하고 살아야 해요. 운동도 꼬박꼬박 가고. 허리도 곧게 펴고. 게다가 노래하다 보면 입 근육이 올라가니까 저절로 웃는 얼굴이 돼요. 노래할 때마다 하루하루 젊어지는 기분이죠.
연주회,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 저희 합창단이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악보를 받아 1주일 동안 다 같이 달달달 연습하고, 강원도 촬영장까지 갔죠. 극 중에 배우 공효진 씨가 우리 나이가 돼서, 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다가 공중으로 붕 뜨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때 내가 와이어 타는 공효진 씨 허리를 잡아줬어요. 이야, 허리가 요렇게나 가늘더라고.
공연하는 날 무대에서 열심히 율동하고 있으면 좌석에 앉은 가족들이 깔깔깔 웃어대는 게 다 보이거든요. 1년에 한 번 연주회 덕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가족들이 모이는 건데, 긴장되는 동시에 기분이 좋죠. 나도 붕 하고 와이어 타는 기분이랄까. 좌석에 가족들이 없다면 그 정도로 신나진 않겠죠.
대한민국 아줌마, 만세!
내가 보니까, 아줌마가 더 바빠야 하더라고요. 그래야 활력이 생겨서 살림도 깔끔하게 하고 말이죠. 아줌마가 신나야 가족도 신나요. 아줌마가 시무룩하면 가족도 점점 시무룩해지죠. 행복 그거 별거 없어요. 어디서 무얼 하든 하루하루 신난다면 그게 행복이지.
노래는 곧 신바람이거든요. 악보를 본다는 건 그런 걸 하나씩 배워간다는 거고. 아줌마들이랑 연습 끝나면 이런 예쁜 카페 같은데 가서 커피도 마셔보고 그 힘으로 집에 돌아가면 믹스 커피 마시며 신나게 살림해요. 더 말이 필요 있을까. 그렇게 사는 지금이 최고지. 아니다, 딸만 잘 결혼하면 돼. 그러면 진짜 내 삶에 더 바라는 게 없어요. 깔깔.
행복, 별것 있나? 까짓 것 마음먹기 달린 거죠.
이야기를 끝낸 곽순학 님은 부지런히 다음 스케줄로 움직입니다. 은행에 들렸다가, 장을 보고, 연습실로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대한민국 아줌마 덕에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신나게 돌아가는 건 아닐까요, ‘남은 커피는 포장해주세요!’ 당당하게 외치는 그 특별한 존재가 있어 우리의 행복도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