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걸으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새롭습니다. 수면에 늘어진 연잎을 볼 때, 바위틈에서 피어난 꽃망울을 볼 때, 소나무의 견고한 나이테를 볼 때, 자연의 생명력에 새삼 감탄합니다. 미술가 김해선 님도 그 힘에 반해 붓을 잡았습니다. 세상과 어울리고 싶다는 새로운 열망도 곧 화폭으로 옮겨지기 시작했죠.
재능을 믿어준 가족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주가 남다르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아이들 키우며 잊고 살다가, 재능 버리지 말라는 주변 조언으로 화실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 사십 대 초반이에요. 그게 십 년 동안 이어져 얼마 전 개인 전시회도 열었지요.
전시를 준비하는 것이 사실 미술가들에게 쉽지 않아요. 경제적인 부담도 있지만, 무엇보다 준비과정에서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 꼭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늘 힘이 되어준 가족들에게 고맙더라고요. 그래서 도록의 ‘작가의 후기’ 페이지를 남편에게 넘겨주었는데, 돌려받은 그 글에 정말 감동을 했었지요.
전시도록의 ‘제1페이지’
살다 보면 부부들 간에도 정성 어린 편지나 문자가 뜸해지잖아요. 그런데 남편의 그 글 하나로 그저 부드럽게 녹아든 거에요. 그동안 편지 하나 안 써준 남편에 대한 서운함도 사라지고 말이에요. 하하.
저를 표현한 글, 남편의 마음이 담긴 그 글이 제게는 정말 생애 큰 감동이었어요. 그전까지 제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면 ‘자수’나 ‘그림’이었는데 얼마 전에 그 순위가 완전히 바뀐 거지요. 지금 제게 가장 아끼는 물건을 묻는다면 바로 이 전시도록이에요. 평범한 도록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이 써준 글이 있는 도록이죠. 도록의 첫 장에서 ‘그니에게 그이가…’ 라고 시작하는,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이 페이지를 저는 정말 애틋하게 좋아합니다.
넓은 화폭만큼 넓어진 마음
저는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워낙 내성적인 데다가 스스로의 틀 안에서 벗어나기 어려워했죠. 그런데 그림을 시작한 이후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지더라고요. 작업을 위해 자료를 찾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많은 걸 접하니까 숨겨진 재능이 나타나요. 열정이 샘솟아서 삶의 의욕도 생기고요.
저는 자연물과 한국적인 소재를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소나무에 빠져있어요. 소나무를 보며 사람과의 인연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보이지 않고 나눠 가질 수 없어도 서로 너그러워지자고,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소나무처럼 살아보자는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이죠.
‘어울렁더울렁’ 사는 세상
한창 작업하던 중 ‘나를 세상 밖으로 한 번 던져 내보이고 싶다’는 꿈을 발견한 날이 있어요. 내가 그린 소나무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나도 세상과 함께 어울렁더울렁 어울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거에요.
‘생각’이란 단어를 순우리말로 ‘해윰’이라 해요. 아름답죠. 제 화실 이름도 ‘해윰’이라 지었어요. 이 공간을 좀 더 많은 사람과 즐기고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바람이에요. 잘 만들어진 것들은 언제나 기억에 남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최고의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만족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가슴 깊이 남겨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면 더욱 좋지요.
사람이 사람에게 오랜 기억으로 남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 몸짓, 그리고 생각들이 내 곁에 영원히 머물며 때때로 위안과 행복이 되어주기 때문이죠. 당신의 기억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