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희 디자이너, ‘300일간의 남미일주’

 
버킷리스트에 세계여행, 장기 여행 등을 담아두고 있지만, 일이나 학업에 매여 그저 ‘꿈’으로만 간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하지만 여기,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300일 동안 남미 8개국을 여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행에서 찾은 가치,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 중인 최윤희 디자이너인데요. 그녀의 ‘오늘’을 바꾼 여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평범한 직장인이 남미여행을 떠나기까지

 
‘300일 동안 남미 8개국 여행’이라는 말만 들으면 특별한 사람만 가능할 것 같은 도전인데요. 사실 이 여행의 주인공인 최윤희 디자이너는 2010년부터 2년 동안 SK텔레콤 브랜드전략실의 SI부서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최윤희 디자이너는 건축학 전공을 살려 T월드숍 디자인을 담당했는데요. 전국의 매장을 다니면서고객 서비스, 광고, 오프라인 공간 등을 고려해 브랜드 이미지를 잘 담아내는 디자인을 했죠.
 
남들과 비슷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최윤희 디자이너는 남편과 함께 한 TV프로그램을 보게 됐는데요. 페루 여행기를 담은 프로그램이었죠. 평소 여행을 좋아했던 그녀는 흘리듯 남편에게 “당신이 마흔 되는 날, 우리도 저곳에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했죠.
 
하지만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고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최윤희 디자이너는 조금씩 그 희망사항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11월,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던 남편이 40세가 되기 딱 두 달 전, 부부는 남미행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중 만난 만년설

 
“주변에서 다들 ‘대단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대단한 생각을 한 게 아니었거든요. 막연한 내일을 위해,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을 버티는게 저에겐 더 힘든 일이었죠. 그래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르려고 노력했어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깝지 않은지, 여행 후에는 어떻게 살 것인지 등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정작 최윤희 디자이너는 그런 걱정 대신 여행에 대한 설렘을 키웠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모아둔 돈에, 자가용을 판 돈을 보태 약 1500만 원의 경비를 마련했고, 최소한의 계획만 세운 후 남미로 향했죠.
 
 
 
 

남미의 소도시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다

 
부부의 첫 행선지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배경이기도 한데요. 최윤희 디자이너는 이 영화가 그려낸 아르헨티나의 로맨틱한 풍경을 꿈꾸며 이곳에서 300일간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300일간의 남미여행이라고 하면 계획을 꼼꼼히 세웠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희는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았어요. 기본적인 짐과 편도 비행기 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달 치 아파트 숙박티켓으로 충분했죠. 첫날, 처음 저희를 반겨준 것은 열정적인 이탈리아 이민자들이었는데요. 긴 밤을 즐기는 현지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죠.”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인들의 정열적인 탱고

 
다음 행선지인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산에서의 3박 4일 트레킹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창백한 블루타워’라는 뜻을 가진 이 산은 찬란한 옥빛 호수, 3000m 높이로 치솟은 거대한 바위가 웅장한 풍경을 자랑하는데요. 하지만 바람이 거세기로도 악명 높아 처음으로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아찔한 경험을 했죠.
 

경이로운 자연 경관을 마주했던 ‘토레스 델 파이네’ 산에서의 3박 4일 트레킹

 
그 뒤로 칠레,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쿠바, 멕시코까지 남미의 총 8개국을 돌았습니다. 이동은 거의 버스로 했는데요. 기내식까지 나오는 버스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남미의 아름다운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행 중에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멕시코시티에서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었죠. 깜짝 놀란 부부는 얼굴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남편의 주머니에 있던 지갑이 사라졌다고 하네요.
 
“이 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화로웠어요. 많은 사람이 남미가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더라고요. 특히 저희는 알려진 관광지를 찾기보다는 관광지와 관광지 사이에 있는 소도시를 많이 다녔는데 그곳 사람들은 소박하고 따뜻했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 같이 편안했고 하루를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콜롬비아의 섬, ‘산안드레스’

 
특히 칠레의 엘키(Elqui)지역에서 묵었던 숙소의 주인은 잊을 수 없다는데요. 칠레의 전통술 ‘피스코’를 만드는 공장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그만 버스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습니다.
 
“휴대폰에는 여행 사진이 가득했지만, 스페인어 실력이 부족해 발만 동동 구르다가 숙소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숙소 주인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곳까지 와 함께 휴대폰을 찾았고, 마침내 휴대폰을 찾은 순간엔 모두가 얼싸안고 기뻐했어요.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준 것에 감사했죠.”
 

아타카마 사막에서 우유니 사막으로 넘어가는 중에 만난 ‘라구나 미스테리오사’

 
 
 
 

여행이 끝난 후, 여행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다

 
그렇게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는 사이, 길게만 느껴졌던 300일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거예요. 여행지에서는 매일 아침, ‘오늘 뭐 먹지’ ‘오늘 뭐 하지’부터 떠올리거든요. 그렇게 ‘오늘의 가치’를 생각하는 연습을 하다보니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뭔지,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지금 무엇을 할지 등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최윤희 디자이너는 자신이 느꼈던 것들을 지인들과 나누기 위해 귀국 후 여행 사진집을 만들어 선물을 했는데요. 책 이름 역시 ‘오늘’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hoy’로 지었습니다.
 

 
“남은 것은 다시 제 일을 찾는 것이었어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남편과 함께 디자인사무실 겸 홈스테이를 열기로 결정했죠. 여러 숙소를 다녀보니 숙소는 숙박기능 외에도 정보제공 역할을 하더라고요. 홈스테이를 통해 더 재미있고 아름다운 한국을 알리고 싶어졌죠. 이름도 ‘가이드’라는 뜻의 스페인어 ‘귀아(guia)’를 넣어 ‘귀아 서울’로 지었어요.”
 
서울 혜화동에 한옥 한 채를 빌린 최윤희 디자이너는 4월 중에 홈스테이를 오픈할 예정인데요. 나중에는 이곳을 관광 디자인 공간으로 꾸밀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구상 중인 프로젝트는 ‘서울 맵(map)’인데요. 칼국수집이 많은 혜화동 관광객을 위한 재미있는 ‘칼국수맵’을 만드는 식이죠. 뿐만 아니라 그녀는 평소 좋아하던 요가를 직접 가르치는 강사로도 데뷔했습니다.
 
최윤희 디자이너는 자신의 남미여행을 ‘버리는 여행’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안정된 일과 익숙한 일상을 버리고 여행을 떠났지만, 그렇게 버리고 난 공간에는 몇 배 더 큰 행복이 채워졌다고 합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일과 일상을 맞이한 최윤희 디자이너, 그녀의 달라진 ‘오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