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가 담긴, ‘덕수궁길’

가을에는 어김없이 덕수궁길을 걷고 싶어집니다. 최근 통행이 제한됐던 덕수궁 돌담길이 개방됐는데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덕수궁길을 걸으며 그곳에 녹아든 사랑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60년 만에 개방된 덕수궁 돌담길

 
닫혔던 길이 열렸습니다. 1959년부터 영국대사관이 점유해 막혀있던 덕수궁길의 일부가 60년 만에 개방되었는데요. 덕수궁길은 덕수궁 대한문에서 덕수 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얕은 언덕길입니다. 과거 덕수궁의 북문인 ‘영성문’이 있던 자리였다고 해서 영성문 언덕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대한문에서 시작해 덕수궁 높은 돌담을 오른쪽에 두고 덕수궁길을 따라 오르면 언덕 중턱쯤 낮은 담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낮은 담장길이 바로 6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길인데요. 덕수궁의 뒤쪽에 있는 길이라고 해 ‘덕수궁 뒷길’, 덕수궁 둘레를 따라 이어진다고 ‘덕수궁 둘레길’이라고도 불립니다. 우뚝 솟은 돌담이 아닌 낮은 담장이라, 신선하게 다가오는데요. 기와를 얹은 담장과 평행을 이루는 영국대사관의 붉은 벽돌 담장이 묘하게 어우러진 골목이기도 합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다들 생각나는 말이 있을텐데요. 연인끼리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실, 덕수궁길에는 이런 속설과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별의 골목이 아닌, 사랑의 골목

 
시간의 태엽을 감아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볼까요? 지금의 덕수궁길에 미국대사관이 있는 곳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이 있었던 곳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사랑했던 죽은 아내를 가까이 두길 원해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궁과 마주한 언덕인 이곳에 왕비의 능을 두었는데요. 왕비의 능인 ‘정릉’이 있었다는 이유로 주소 개정 전에는 ‘정동’으로 불렸습니다.
 
현재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성당이 있는 자리엔 ‘홍천사’라는 원당사찰이 있었는데요. 죽은 아내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었으니 이 또한 이성계의 애틋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새로 개방된 그 길은 오래도록 연정을 품고 있는 ‘사랑의 골목’인 것이죠.
 

새로 개방된 덕수궁길에는 60년 전 옛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볼 수 있다(왼쪽), 영국대사관 옆에 자리한 성공회 성당(오른쪽)

 
반면 이 길에는 아픔도 스며 있습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아관파천’ 때 이용한 길이기도 하니까요. 일제 강점기 때는 원래 있던 건물이 일본인 학교와 일본이 세운 방송국으로 변해버렸습니다. 90년 전 경성방송국이 있던 곳은 과거 인수대비의 집무실이 있던 터였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곳이죠. 이 역사의 공간에는 모던 한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인 ‘콩두’가 자리합니다. 우리 전통 장과 콩을 주원료로 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데요. 혀끝에 맴도는 역사의 맛을 느껴보세요.
 

레스토랑 콩두(하단 왼쪽, 출처: 콩두 홈페이지), 구세군 중앙회관(하단 오른쪽)

 
구세군 중앙회관은 선왕들의 어진이 모셔진 ‘선원전’의 부속건물을 헐어 만든 구세군 교회입니다. 좌우대칭이 균형감을 이룬 르네상스 양식 건물로 당시 서울의 10대 건축으로 꼽혔을 만큼 근대건축으로써 가치가 크죠.
 
웅장하게 높은 기둥, 붉은 벽돌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곳은 구세군 본부가 있는 영국의 ‘클라톤 콩그레스홀’을 모델삼아 지었는데요. 1926년 구세군 사령관 브람웰 부드의 70세 생일을 기념해 세운 후 1985년까지 구세군사관 양성 학교로 사용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수없이 찾았다고 하는데요. 오롯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좋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이 가을 연인과 함께 들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정동극장(왼쪽)과 1층 카페 정담(오른쪽, 출처: 정동극장 홈페이지)

 
돌담을 따라 걸어 내려오다 보면, 정동극장 가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요. 정동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이념으로 1995년에 개관했습니다. 한국의 공연사를 대표하는 유서 깊은 공연장이죠. 1층에는 카페 정담도 있으니 따뜻한 차 한잔도 좋겠습니다.
 
정동극장 옆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있는데요.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중명전은 본래 ‘수옥헌’이라고 불렸습니다. 황실 도서관으로 설립된 서양식 건축물인데요. 여기에는 근대문물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있죠.
 

중명전(왼쪽)과 카페 버즈앤벅스(오른쪽, 출처: 버즈앤벅스 네이버 플레이스)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의 화재로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외국인 접견실 혹은 연회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가 되기도 했죠. 현재 중명전은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으니 역사가 깊이 스며든 공간을 한 번 들러봐도 좋겠습니다.
 
이화여고 교문의 오른쪽 ‘사주문’으로 들어서면 100주년 기념관 1층에 버즈앤벅스가 있습니다. 100년 전에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피를 판매했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인데요. 복층 구조의 탁 트인 실내와 통창은 시원한 전망을 선사하죠.
 
지금 덕수궁 돌담길은 양 옆의 높은 담장에서 뻗은 울울한 수목이 자연 터널을 만들어 데이트하기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요. 천천히 돌담길을 걸으며 애틋한 러브 스토리와 역사 이야기를 음미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