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치가 빛나는, 을지로 인쇄골목

600년의 역사가 흐르는 을지로 인쇄 골목. 좁은 골목 사이로 사람과 기계 소리가 번갈아 들려오는 골목이죠. 긴 시간 인쇄 장인들이 묵묵히 이 골목을 지켜왔습니다. 수십년 간 이 골목을 지켜온 노포들도 골목에 시간의 가치를 더해줍니다. 이 골목과 동고동락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구두 가게, 밥집, 다방 등을 운영하는 주인장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을지로 인쇄골목으로 가봤습니다.
 

 
 
을지로 인쇄 골목은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하고 책을 찍어내던 주자소 관청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 일제 강점기에는 을지로에 경성극장, 중앙관 등의 영화관이 생기면서 영화전단지를 찍는 인쇄소가 쉴 틈 없이 돌아갔죠. 1980년대에는 선거용 인쇄물이 급증하면서 인쇄 골목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많은 것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인쇄골목을 지키던 가게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변했지만, 여전히 이 골목은 예리한 감각을 가진 인쇄 장인들이 지키고 있는데요. 더불어 역사를 함께 해온 주변의 노포들에서 아날로그의 정겨움과 지난 시간들의 가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마주할 수 있는 골목

 

 
1936년 문을 열어 올해로 81년 째, 을지로 인쇄골목 일대를 지키는 가게가 있습니다. 바로 국내 최초로 등산화를 만든 송림수제화인데요. 송림수제화 주인장은 “건물은 변했어도 같은 자리에서 지금까지 있었어요. 50년, 60년 전에도 서울에서 여기가 제일이었죠. 이 동네를 주름잡던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신발을 맞춰 신었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산악인 고상돈, 세계 최초 3극점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한 산악인 허영호,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마라토너 손기정 등 각계각층의 단골들이 송림수제화의 역사와 함께 해왔죠. 수선을 맡기기 위해 가게를 찾은 40년 단골 할아버지는 “맨발로 걷는 것처럼 이곳 신발은 편하다니까.”라며 덧붙였습니다.
 
좁은 공장에서는 예닐곱 명의 신발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신발을 만듭니다. 내공을 뿜어내는 뒷모습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감동적인데요. “앞으로도 계속 손님 발을 더 편하게 해주는 신발을 만들고 싶다”는 신발 장인의 한 마디에는 진심이 묻어 납니다.
 

 
골목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3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킨 오래된 식당, 동원집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동원집에서는 특별한 감자탕을 만날 수 있는데요. 일반적인 감자탕이 아닌, 돼지 등뼈와 감자만을 재료로 넣고 12시간을 끓여 감자국이라고 불립니다. 동원집은 협소한 공간이지만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죠.
 

 
동원집을 지나치면 등장하는 노가리 집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된 노동 후 퇴근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곳이기도 하죠. 가게 사장님들마다 각자의 노하우도 있습니다. 노가리를 콕 찍어먹는 매콤한 양념만큼이나 맥주의 맛도 신경쓴다는데요. 가장 맛있는 맥주 맛을 위해 여름엔 2~4도, 겨울엔 4~6도에 맞춰 맥주를 내놓는 가하면, 청량한 맥주 맛을 위해 탄산의 양 또한 집집마다 다릅니다.
 

 
난로에 올려둔 주전자, 한 장씩 뜯어 넘기는 일력, 번들거리는 레자쇼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설탕 그릇까지 꼭 70, 80년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처럼 시간이 멈춰져 있는 곳, ‘을지다방’의 주인장은 “여긴 한 시대의 문화가 서려 있는 곳이야. 이곳이 제일 잘 나가던 시절부터 역사를 같이 하기도 했으니 더 의미 있지.” 라고 설명합니다.
 

 
예로부터 다방은 예술가와 대학생 등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문화 공간이었는데요. 이제 그 시절 다방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에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이곳이 더욱 반갑기만 합니다.
 
을지다방은 1985년 같은 건물 1층의 을지면옥과 함께 문을 열었는데요.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던 주인장은 계란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건네며 “이곳처럼 변하지 않는 곳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오랫동안 지키고 싶어.”라고 나지막히 말합니다.
 
다양한 사람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어우러져 골목을 가득 메운 을지로 인쇄골목. 이곳을 걸으며 가는 해의 아쉬움과 새해의 설렘이 공존하는 12월을 마무리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