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즌으로 찾아 온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 ‘장학퀴즈’

클래식과 담쌓은 사람도 첫 소절만 들으면 안다는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대한민국 퀴즈쇼의 산증인 ‘장학퀴즈’의 오프닝 음악이었죠. 1973년 MBC에서 처음 방송된 장학퀴즈는 1997년 EBS로 옮긴 후 지금까지 45년 넘게 이어지면서 국내 최장수 TV 프로그램으로 인정받기도 했는데요.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 장학퀴즈와 함께 원조 퀴즈 프로그램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장학퀴즈 학교에 가다!

 
‘장학퀴즈 학교에 가다’ 부산해사고등학교 편

‘장학퀴즈 학교에 가다’ 부산해사고등학교 편

 
 
지난 4월 21일, ‘장학퀴즈 학교에 가다’ 시즌5의 첫 회가 방송되었습니다. EBS 방송 횟수만 1051회를 맞이한 장학퀴즈는 매 시즌 새로운 코너를 통해 색다른 재미를 선보이는데요. 부산해사고등학교 학생들과 퀴즈를 풀면서 새로워진 장학퀴즈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장학퀴즈 해사고등학교편에서 미션을 수행중인 학생들의 모습
 
 
학교를 대표하는 50명의 학생들이 다양한 문제를 풀어 장학금을 획득해왔던 장학퀴즈는 이번 시즌에 대대적인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바로 학생들이 협동심을 발휘하고 창의력을 뽐낼 수 있는 새로운 코너들이 대폭 강화된 것인데요. 5명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는 창의력 퀴즈와 함께 다양한 Activity를 통해 과제를 해결하는 협동 미션, 그리고 선생님들도 함께 참여하는 코너까지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전교생이 함께 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습니다.
 
재치 있는 입담을 자랑하는 김일중 아나운서와 이지애 아나운서가 환상의 케미를 선보이는 가운데, 학생들은 자신의 매력과 끼를 발산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장 분위기가 뜨거웠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 인재 양성의 역사

 
1970년대 MBC에서 방송된 장학퀴즈

1970년대 MBC에서 방영된 장학퀴즈

 
 
여전히 EBS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장학퀴즈. 하지만 스마트앱을 사용해서 문제를 푸는 방식부터 상품으로 주는 최첨단 노트북까지 많은 부분에서 낯선데요. 예전 장학퀴즈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차인태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트인 “전국 고등학생들의 건전한 지혜의 대결, 장학퀴즈!”가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학퀴즈는 지난해 한국기록원(KRI)으로부터 최장수 TV 프로그램 인증을 받았습니다. 7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한국 방송 역사를 생각하면, 45년째 건재하고 있는 장학퀴즈는 유례가 없을 정도죠.
 
장학퀴즈가 세월의 부침 없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결단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학퀴즈 방송 시작 당시만 해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SK는 ‘인재가 가장 소중한 자원’이라는 믿음과 기업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장학퀴즈를 후원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기업들이 자사 브랜드와 상품 홍보를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협찬하고는 있지만, 장학퀴즈처럼 ‘청소년 인재양성’이라는 공익적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반세기 가까이 후원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70년대 학생들의 최애템은? 시대별 상품 변천사

 
시대별 장학퀴즈 우승 상품 변천사

시대별로 달라진 장학퀴즈 상품의 변천사

 
 
장학퀴즈에서 참가 학생들에게 주는 상품은 그 시절 학생들이 가장 갖고 싶어했던 아이템이었습니다. 그래서 장학퀴즈 상품의 변천사를 보면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지죠.
 
장학퀴즈가 전파를 타기 시작한 1970년대 초반에는 워커힐호텔 ‘고급 케이크’가 상품이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든지 저렴한 가격에 사 먹을 수 있는 케이크를 그 시절 학생들은 상품으로 받고 싶어했다고 하니 신기하죠? 70년대에는 한국 경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케이크는 생일에도 먹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음식이었답니다.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상품은 만년필과 탁상시계로 바뀌었습니다. 학구열 넘치는 이 상품은 케이크와 마찬가지로 잘 사는 집 아이들이나 가질 수 있었죠.
 
80년대 학생들은 어떤 선물을 갖고 싶어했을까요? 정답은 자전거와 체육복, 가방, 그리고 오디오 테이프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했던 70년대와 달리 이제는 여가와 오락, 패션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90년대에는 나라에서 도서상품권 발행을 허가하면서 장학퀴즈 인기상품으로 등장했고요. 영어 교육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사전도 제공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는 전자사전의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밀레니엄 세대를 지나면서 디지털 카메라와 태블릿PC 등 전자제품에 대한 니즈가 늘었습니다.
 
 
 

인기만큼 다사다난했던 장학퀴즈

 
장학퀴즈가 진행 중인 부산해사고 세트장
 
긴 역사와 인기만큼 장학퀴즈에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많았습니다. 장학퀴즈는 녹화 당일이면 방청을 원하는 인파가 몰려드는 바람에 경찰까지 출동했는데요. 녹화장에서 부상 당한 학생이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방송을 보겠다고 고집을 부린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장학퀴즈를 둘러싼 학교 간 자존심 대결이 치열했습니다. 심지어 학교장이 나서서 단체 응원단을 이끌고 스튜디오를 점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그리고 장원에 오른 학생을 위해서 학교 밴드부가 시가행진을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장학금에 얽힌 일화도 있습니다. 초창기 장원학생에게 지급하는 장학금은 대졸 신입사원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으로 전액 현금 지급이었는데요. 장원을 했다고 동네잔치를 열고 나면 장학금이 대학에 가기도 전에 사라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최종현 선대회장은 장학금을 현금 대신 장학증서로 대체했죠. 그리고 대학 입학 후 기 장원에게는 대학 4년 등록금 전액을, 기 차석에게는 2년 등록금을, 그리고 월 장원에게는 입학금을 지원함으로써 장학금의 처음 취지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도 인재양성 철학 전파

 
중국에서 진행된 장학퀴즈
 
지금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류지만 2000년대로 돌아가 보면 매우 진귀한 현상이었는데요. 한류의 시작점에 장학퀴즈가 있었습니다. 해외 녹화가 쉽지 않았던 시절 장학퀴즈는 일본과 중국에서 교포 고교생 특집편을 촬영하기도 했고요. 1993년부터 96년까지 ‘세계로 가는 장학퀴즈’라는 제목으로 영국, 독일, 호주 등을 돌면서 학생들에게 세계를 보는 안목을 넓혀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장학퀴즈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SK는 2000년부터 중국 청소년들이 참가하는 장학 프로그램인 ‘SK장웬방(壯元榜)’을 후원해왔으며, 2016년부터는 중국 국영방송인 CCTV를 통해 ‘SK극지소년강(极智少年强)’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중국 전역의 내로라하는 대표학교가 참여하는 전국형 퀴즈 대항전인 SK극지소년강은 중국 학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과 맞물려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재 양성의 가치를 전파하고 문화 콘텐츠의 한류에도 기여한 SK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중국인의 마음에 ‘인재가 가장 큰 자원’이라는 철학을 심어주었고, 한국 기업의 바람직한 이미지도 각인할 수 있었습니다.
 
 
 

100년을 내다보고 키우는 인재

 
장학퀴즈 방송 중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부산해사고 학생들
 
 
장학퀴즈에서 우승한 학생들은 그야말로 가문의 자랑이고 증명된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최종현 선대회장이 장원학생들에게 “졸업하고 SK에 오면 안 돼. 오지마”라고 해서 유명한데요. SK보다 더 높은 곳을 목표로 삼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해 달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습니다. 장학퀴즈는 인재를 키워서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는 SK의 인재보국(人材報國)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장학퀴즈는 단순히 그 오랜 역사만으로 가치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교육과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청소년에게 꿈을 심어준 시대의 문화코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0년 후를 내다보며 인재를 키우는 SK의 인재양성 목표는 이제 반환점을 돌아서 앞으로도 더욱 속도를 낼 예정입니다.
 
 
 
 
글 ∙ 사진/ MEDIA SK, 미디어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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