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낮은 전력에서도 데이터가 유지되는 D램 설계 기술로 과학기술부 ‘이달의 엔지니어상’ 수상. 지난해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낸드플래시 개발로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한 SK하이닉스 F소자D팀 박성계 연구위원. D램과 플래시메모리를 아우르는 반도체 실력자의 인생을 가득 채운 그것, 바로 열정과 사명감입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우리 삶은 중간 과정 없이 한 단계를 껑충 뛰어오르곤 하죠. 계절의 변화가 부드러운 곡선이라면, 기술의 변화는 계단식입니다. 더 높은 곳을 경험하면 이전 단계는 쉽게 잊고, 이전에 겪었던 불편함은 추억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쉽게 잊히는 그 과정이 개발자에게는 삶입니다.
한 손에 쥐어지는 스마트폰도 1970년대에 만들어졌다면 5톤 정도… 집채만 했겠죠. 아이폰 앞에 스티븐 잡스가 있다면, 그 뒤에는 플래시메모리를 연구∙개발하는 엔지니어들이 있습니다. 메모리 혁명 없는 스마트폰은 불가능하니까요.
복잡해 보이지만 모든 디지털 데이터는 둘 중 하나, 0 아니면 1입니다. 디지털 기기에 들어온 영상과 소리, 데이터를 저장하는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는 박성계 연구위원의 엔지니어로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성공, 아니면 실패죠. 그러나 인생은 다릅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실패도 성공일 수 있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실패를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대용량의 꿈을 꾸며 나노미터의 세계에서 일하는 박성계 연구위원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노미터의 사나이’다
SK하이닉스는 D램과 플래시메모리를 주로 생산합니다. 그 중 플래시메모리 연구개발이 제 일이고요. 핵심 업무는 메모리 용량을 늘리는 것이고, 핵심 경쟁력은 저장된 데이터의 신뢰성을 유지하면서 크기를 줄이는 겁니다. 그래서 최소 단위의 기억소자인 ‘셀’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죠.
20나노미터는 얼마나 작을까요? 일반적으로 머리카락의 지름이 0.1mm라고 한다면, 그 머리카락을 지름 1km로 확대하고, 그 중 20cm 정도를 잰 것이 바로 20nm입니다. 20nm의 셀 하나에 0 또는 1의 데이터가 저장되고, 수십억 개의 셀이 모여야 용량이 큰 칩 형태의 메모리가 되죠. 칩 형태의 메모리는 초기에 ‘웨이퍼(Wafer, 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 상태로 생산되는데, 셀의 크기가 작을수록 하나의 웨이퍼에서 얻을 수 있는 메모리 칩의 개수가 늘어납니다. 이는 비용 절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매우 중요하죠.
셀의 크기만 줄이는 게 다는 아닙니다. 메모리 칩의 사이즈를 줄이고, 많은 데이터도 안정적으로 저장해야 하죠. 셀의 크기가 줄어드는 건, 칩의 크기가 줄어드는 동시에 셀과 셀의 거리가 좁아졌다는 뜻입니다. 거리가 좁아지면 셀끼리 간섭이 심해져서 셀이 죽기도 하죠. 그만큼 데이터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거에요. 아파트 벽이 얇아지면 소음이 심해서 생활을 방해받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셀과 칩의 크기를 줄이는 걸 ‘스케일링 다운‘이라고 합니다. 박성계 연구위원은 스케일링 다운을 시도할 때마다 새롭게 발생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메모리의 신뢰성을 높여갑니다. 공정팀에서는 그의 설계대로 웨이퍼를 만드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웨이퍼 상태를 테스트해서 칩의 특성과 성능을 분석하는 것도 역시 박성계 연구위원의 몫입니다.
사명감과 고집을 거쳐 탄생한 반도체
지금은 플래시메모리 분야를 담당하지만, 4년 전까지만 해도 박성계 연구위원은 D램 개발에 주력했습니다. 당시 회사를 살려야겠다는 고집스러운 사명감은 ‘저전력 셀 기술(리라이터할 때 낮은 전력에서도 효과적으로 데이터가 유지되는 설계 기술)’로 1,000만 분의 일의 확률이라는 불량의 원인을 찾아서 제어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회사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했고, 혁신적인 기술로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이달의 엔지니어’로도 뽑혔습니다. 지금도 D램은 물론 플래시메모리까지, SK하이닉스의 제품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옵니다.
엔지니어의 배려, 세상을 바꾸는 동력
제 생활신조처럼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습니다. 카이스트 입학시험을 준비할 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홀가분하더라고요. 떨어져도 미련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 더는 당락의 문제가 아닙니다. 회사생활도 같아요.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실패해도 후회나 미련보다 배움이 남아요. ‘이렇게 해볼걸’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를 깨닫는 거죠.
제게 꿈은 늘 무빙 타깃(Moving Target)입니다. 산에 오를 때 정상을 보고 오르면 금방 지쳐요. 한 등산 고수는 땅만 보고 가라더군요. 가다 보면 얼마만큼 와 있다고, 정상만 바라보면서 가는 것보다 그 길에 집중하면서 걷는 것이 정상에 오를 확률이 더 높아요. 과정도 즐겁고요. 일도, 꿈도 마찬가지예요. 현재에 집중하면서 그저 걷는 거죠.
검증된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진화된 기술을 현장에 적용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 좋아 엔지니어의 길을 택한 박성계 연구위원. 스무 살 이후로 지금까지 반도체와 동고동락했지만, 아직도 반도체가 재미있답니다. D램 분야의 최고가 됐지만, 매너리즘에 빠지기 싫어 플래시메모리 분야로 옮겼을 만큼 자신을 계속 채찍질합니다.
지금 그는 팀원들은 뒤통수만 봐도 고민을 알 듯한데, 초등학생인 작은아들의 고민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고민입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 모두의 상상을 담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