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모두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 앞에 한 남자가 오랫동안 서 있습니다.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듯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가방 속에서 작은 스케치북 하나를 꺼내 듭니다. 얇은 펜이 왔다갔다 하더니 어느새 눈앞의 풍경이 스케치북 안에 그대로 들어옵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정승빈 님은 그제야 자리를 떠납니다.
만화를 따라 그리던 소년
사물과의 기분 좋은 교감
그림을 그리려면 관찰을 많이 해야 해요. 컵 하나를 오랫동안 바라보면 그전엔 보이지 않던 미묘한 각이나 작은 얼룩까지도 보이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컵이지만,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 의미 있게 다가와요. 어떤 모양이었는지, 왜 만들어졌는지, 누구의 손을 거쳐왔는지… 컵의 이야기가 들리는 거예요. 전에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순식간에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로 변하는, 말이 없는 사물과 교감하는 기분 좋은 순간이랄까요?
그건 제가 여행길에 스케치북을 꼭 챙겨가는 이유이기도 해요. 낯선 곳에는 그리고 싶은 것들이 더 많거든요. 여행지에서 그릴 시간이 부족할 땐 사진에 담아뒀다가 나중에 그리기도 하는데, 확실히 직접 보고 그린 것이 나아요. 결과물 자체에 큰 차이는 없지만, 땡볕에서 땀 흘려가며 그린 그림 속에는 그 순간의 기억들이 살아 움직여요. 조금 고생스럽긴 하지만 그런 추억이 담긴 그림에는 다른 어떤 그림이나 사진보다도 애착이 가죠.
스케치북을 잃어버렸던 아찔한 순간
베트남을 여행하다가 스케치북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순간 하늘이 노래졌죠.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풍경과 소품을 하나하나 담은 소중한 스케치북이었거든요. 스케치북 대신 차라리 지갑을 잃어버렸으면 했을 정도였어요.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그와 똑같은 그림은 다시 그릴 수 없으니까요.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숙소에서 일하던 아가씨가 당신 거 아니냐면서 스케치북을 건네주는 게 아니겠어요? 숙소에서 제가 그림 그리는 걸 본 거죠. 그때의 기쁨이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요.
잘 그린 그림보다 따뜻한 그림
스케치할 대상을 고를 땐 예쁘거나 멋진 풍경보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풍경을 찾아요. 제가 그렇게 느낀 풍경을 그리면,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최근에는 지금까지 그려온 소소한 그림을 모아 작은 그림책을 만드는 ‘드로잉 북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많은 사람이 후원해준 덕분에 벌써 첫 번째 드로잉 북인 ‘명랑여행용품전’이 나왔답니다. 소소한 여행용품 속에 담긴 감성과 교감. 제가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죠.
그림을 잘 그렸다는 말보다 그림이 따뜻하다는 말이 더 좋아요.
마음을 따뜻하게, 뭉클하게 해주는 그림말이에요.
그림도 글과 같이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시상을 떠올리는 방랑시인처럼, 여행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따뜻한 풍경을 모두 그리는 것이 정승빈 님의 꿈입니다. 스케치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는 마치 지갑 속에 돈이 두둑하게 들어있는 것처럼 든든합니다. 어딜 가든 펼칠 수 있는 스케치북 안에는 그의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가 한가득 들어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