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길을 찾다 ‘엔비전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남녀 주인공이 처음 인연을 시작한 ‘암흑카페’를 기억하시나요? 두 주인공은 깜깜한 암흑 속에서 오직 목소리만으로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에 빠지게 되죠. 우리 가까이에서도 이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의 100분, 이색적인 전시를 주최한 사회적기업 ‘엔비전스’를 소개합니다.
 
 

입소문이 보증하는 독특한 전시, ‘어둠 속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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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이 늘어선 고즈넉한 북촌에 조금 특별한 전시가 열립니다.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라는 이름의 이 전시는 완벽하게 빛이 차단된 어두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데요. 칠흑 같은 전시장에는 7개의 테마가 준비되어있고, 관람객은 로드마스터와 함께 100분간 전시장 내부를 체험합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전시이다 보니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내부가 공개된 적도 없습니다.
 
<어둠 속의 대화> 전시에 참여하면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어두운 주위 환경에 시각이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오히려 촉각, 청각 등의 감각이 더 예민하게 깨어남을 느낄 수 있죠. 관람객 간에 자연스레 서로를 의지하게 되고, 시각장애인들의 입장을 공감하는 새로운 경험도 연달아 따라옵니다. <어둠 속의 대화>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되었고, 30개국 130여개 도시에서 85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거쳐갔습니다. 2009년부터는 사회적기업 ‘엔비전스’를 통해 국내에서도 전시가 진행 중이죠.
 
 

미술대학 진학을 꿈꾸던 청년, 사회적기업가가 되다

 
 
엔비전스 송영희 대표는 미술대학 진학을 꿈꾸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고3 무렵,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시각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방황의 시간을 거친 후에는 오히려 일반 시각장애인이 택하는 빤한 길을 걷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피아노 조율사, 컴퓨터 속기사, 싱어송라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며 살던 중, 관람객으로 <어둠 속의 대화> 전시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전시 기획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기획사가 도산한 후에는 직접 엔비전스를 설립해 <어둠 속의 대화>를 이어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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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제한적이에요. 저 역시 새로운 직업에 도전했지만, 사회에 온전히 섞이지 못했고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기도 힘들었죠. 시각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에 한계가 있다는 상황에 개탄해왔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도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어둠 속의 대화>를 만나면서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희망을 찾았어요. 이 전시가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에 쏟아지는 편견을 걷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획부터 관리, 인사, 홍보에 이르기까지 엔비전스에 근무하는 시각장애인의 업무 영역에는 벽이 없습니다. 엔비전스는 웹 접근성팀을 신설해 웹 접근성 사업에도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데요. 시청각장애인이 온라인 정보에 접근할 때 막히는 부분의 개선방안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최근에는 웹 접근성을 고려한 사내 그룹웨어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일반 기업은 물론 공공기관에도 시청각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그룹웨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인데요. 장애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어렵게 기업이나 기관에 채용되어도, 결재 하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시스템 때문에 또 한 번 소외되는 환경을 개선하고자 한 것이죠.

엔비전스는 시각장애인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해요. 이곳에서 일하는 게 마지막 목표가 아니라, 이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다양하게 보고 적극적으로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이곳에서 2년 동안 근무하고 7급 공무원이 된 친구가 좋은 모델이 되겠네요.

스스로 빛나는 사회적 가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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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도 당당한 사회 일원으로서 부족함 없이 일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는 송영희 대표. 그의 신념은 전시 <어둠 속의 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어둠 속의 대화> 관람객의 상당수는 전시와 사회적기업의 연관성을 알지 못하고 전시장을 찾습니다. 송영희 대표는 사회적기업이라는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오직 콘텐츠의 힘으로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도전해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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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회사가 색다른 문화 콘텐츠만으로 충분히 시장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회적기업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성을 부각하면 사회적 투자나 기부, 지원을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죠. 하지만 시장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경쟁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자리를 잡기까지 힘들겠지만 내성이 생기면 더욱 단단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겠죠.

송 대표는 전시와 관련된 대외적 홍보에 있어서 공공성을 강조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회적기업의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송영희 대표가 내린 답은 ‘사회적기업’이라는 타이틀이 대중의 선택을 좌우하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엔비전스의 자신감을 이렇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송영희 대표는 억지로 드러내지 않아도 결국 스스로 빛나는 사회적 가치의 힘을 강조합니다. <어둠 속의 대화>에서 공공성을 애써 강조하지 않았듯, 사회적 가치가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길 바라는 것이죠. 송영희 대표는 인터뷰 내내 희미한 시력에도 부축 없이 사무실 구석구석을 누비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더 많은 장애인의 성장과 자립을 돕고, 사회적 가치를 곳곳에 스미는 꿈을 품은 엔비전스의 다음 행보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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