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잔을 채우는 소설가, 김태우의 행복은 ‘본차이나’다

행복피플-김태우의 행복은 본차이나다
커피와 책. 이만한 궁합이 또 있을까요? 입에 맞는 원두를 골라 커피를 내리고, 취향에 맞는 소설집을 골라 테이블에 앉으면, ‘아! 너무 좋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이 풍경은 가을에 접어든 어느 카페의 일상 풍경이기도 하지요. 꽃무늬 촘촘한 도자기 잔에 담긴 커피에서 고집스레 골라 볶은 좋은 원두의 짙은 향이 배어나고, 주인의 취향을 대변하는 책들이 겹겹이 쌓인 공간. 글 쓰는 바리스타, 김태우 님의 커피와 책이 어우러진 카페로 찾아가 봅니다.
 
 


 
 

새벽녘, 갓 내린 커피 한 잔의 마력

 
 
십여 년 전에는 시사프로그램 라디오 작가를 했어요. 젊을 때는 거대 담론을 다루거나 토론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오래 하니까 몸의 근육이 굳더라고요. 자판을 치던 팔이 어느 순간 어깨 위로 안 올라가고, 내가 다루는 모든 것이 묘연해진 날이 있었죠.
 
커피를 내리다
그런 새벽에 천천히 커피를 내려 마시는데, 갑자기 굳었던 온몸이 이완되는 경험을 한 거에요. 팔도 다시 올라가고요. ‘왜 이렇게 나는 스스로 팽팽하게 조이며 사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의 경험을 새기며 커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연주자에 따라 달라지는 재즈 음악처럼, 커피에도 정답이 없어요. 머신도 사고, 핸드드립도 하고, 책 사서 보고, 7~8년 커피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기 혀’가 생겼더라고요.
 
 

나만의 혓바닥을 가지겠다는 의지

 
 
글쓰기와 커피는 통하는 면이 많아요. 가장 큰 공통점은 ‘정해진 답은 없다’는 거에요. 두 분야 모두 ‘자기 혀’가 있어야 해요. 자신만의 관점 말이죠. 사람들은 보통 모험을 하기보다 매뉴얼에 따라 살려고 하잖아요. 커피만 해도 스스로 맛을 찾아 공부하기보다는 인증된 커피 아카데미에 가서 ‘프레임’을 먼저 접하려고 하고요. 프레임이 생겨버리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참 힘든데….
 
소설가 김태우의 카페
제가 십여 년 간 글을 써 오면서 이런 식으로 커피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 재밌어요. 생두를 볶다 보면 좋은 맛을 내는 어떤 지점이 있어요. 그 이상 볶으면 안 되는데, 욕심을 내고 선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커피에 늘 나쁜 맛이 섞여 버려요. 힘을 빼야 원두가 좋게 볶이듯,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불필요한 힘과 장식은 빼는 게 좋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문장은 늘 간결하고 짧으니까요. 글과 커피를 같이 다루다 보니까 혓바닥에 관한 주관이 생긴 거죠.
 
 

차곡차곡 시간을 들여 쌓은 글들

 
 
인생을 살면서 저는 ‘시간’의 힘을 믿게 되었어요. 하고 싶은 분야에 그 동안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는지가 ‘용기’ 같은 게 되는 거죠. 저는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계속 홀로 소설을 썼어요. 신춘문예는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도전했는데 마흔이 넘어 등단을 했고요.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 가족들 반대가 심했거든요. 그런데 한 십 년 글을 쓰고 있으니까 주위에서 먼저 ‘김작가, 김작가!’ 불러주더라고요. 그 시기, 저라고 왜 불안하지 않았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우리 출판계가 이렇다는데 내가 가능할까?’ 하며 흔들릴 때마다 외우던 만트라(주문)가 있었죠. ‘공든 탑이 무너지랴’. 공을 들인다는 건 시간을 들인다는 말이잖아요. 시간으로 쌓은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여기 카페에서 커피 한 잔 곁에 두고 써왔던 글이 결국 제 등단작이 되었듯 말이에요.
 
본 차이나
 

‘본차이나’ 한 잔에 채우는 인생

 
 
커피는 음료를 담는 용기의 재질이 중요해요. 양철인지 플라스틱인지, 아니면 사기인지 유리인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맛이 달라지거든요. 가장 좋은 잔을 꼽으라면 당연히 ‘본차이나’에요. 커피의 풍미를 살리죠. 제가 가장 아끼는 잔이기도 하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행복이라는 게 거대한 성취에서 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이런 말을 했어요. 유년기 때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부도가 난 후 침울하고 궁상맞게 변해 버리셨대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브람스와 바그너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자신이 가수가 되었다고요. 제가 좋은 커피를 본차이나에 담아 마시는 이유도 그와 비슷해요. 생활에 쫓긴다고 쫓겨만 산다면, 인생의 다음 페이지도 내내 쫓기며 쓰게되는 거잖아요. 제가 그걸 경험했던 거죠. 저 역시 팔이 안 올라가는 시간이 있었지만,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다시 팔을 움직이게 했어요. 좋은 잔 하나 정도 가지고 집에서 그 시간을 누리는 기쁨이 살면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커피를 나누는 시간

가장 좋은 잔에 따른 커피 한 잔의 여유가 곧 내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만든다고 봐요.

 


 
 
사람들은 ‘스펙’ 개발에는 힘을 쓰지만, 자기만의 ‘취향’을 개발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속도감 없는 곳에 머물러야 하는 개인의 여유란 ‘사치’로 느껴지기 때문이죠. 김태우 님이 말하는 ‘여유’는 보다 멀리 가기 위한 멈춤입니다. 가장 좋은 본차이나 잔을 꺼내 커피를 채우는 것, 나만의 혀로 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간…. 이 역시 행복을 꿈꾸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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