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술잔에 둥실 뜬 보름달을 노래한 작품이 많습니다. 세계의 문인들이 술을 함께하며 ‘변하지 않는 것’으로 달을 예찬했기 때문인데요. 한혜령 님은 술과 함께하는 ‘달’을 ‘마주 앉은 친구’에 비유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건 ‘술’이나 ‘친구들’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흥에 취해 주고받는 삶의 이야기들로 가득 찬 어른들만의 신 나는 놀이터. 서촌 골목 끝에서 매일 밤 친구들과 건배를 하는 한혜령 님의 가게로 찾아갔습니다.
“젊은 여자가 술집을 연다고?”
저는 여기 서촌에서 나고 자랐어요.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배님일 정도로 토박이예요. 어느 날, 집 앞에 맥줏집이 하나 생긴다는 거에요. 워낙 맥주를 좋아해 기분 좋게 달려갔죠. 술을 좋아한다는 건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과 비슷하잖아요. 가게 주인들과 쉽게 친해졌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가게를 이어받게 되었어요. 그게 2년 전이었죠. 젊은 여자가 술집을 운영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다들 의아해 했어요. 고충도 좀 있었고요. 그런데 제가 워낙 동네 토박이다 보니, 주변이 온통 친구들이에요. 이곳이 점점 아지트가 되더라고요.
맥주를 마신다는 건 사람을 얻는다는 것
제 행복요? 정말로 ‘맥주’에요. 하하. 얼마 후에 결혼식이라 요즘은 자제하고 있어요. 그래서 좀 아쉽죠. 장사를 떠나서,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가 좋아요. 많은 사람에게서 저와는 다른 행복을 보곤 하죠. 제 친구들이 정말 다양하거든요. 디제이 하는 친구부터 학교에서 수학 가르치는 친구, 백수부터 직장인까지 다 있어요. 모두 여기 와서 섞이고 놀고 맥주를 마시죠. 물론 술값 다 받고요. 제가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거에요. 친구들과 함께 그 흥으로 일상을 사는 것!
아빠와 주고받는 술잔, 알싸한 얘기들
전 아버지랑 친구처럼 지내요. 아빠랑 정식으로 술을 같이 한 건 중2 때였죠. 아빠는 ‘주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식탁 예절도 엄격하게 가르치셨어요. 무뚝뚝하신데 자식 사랑은 엄청난 멋지신 분이시죠. 7살 때 아빠랑 둘이 기차 여행을 갔었어요. 그때는 역 앞에서 가락국수에 컵 소주를 팔았거든요. 아빠가 시켜놓은 소주를 제가 물인 줄 알고 꿀꺽꿀꺽 다 마신 거에요. 제 인생 최초로 마신 술에 해롱해롱 취해서 결국 여행은 못 가고 집에 왔어요. 그 이야기를 여태껏 해요. 하하.
아빠는 요 아래서 막창집을 운영하세요. 가게 끝내면 여기로 오셔서 맥주 한잔 하거나, 제가 거기로 가서 같이 소주 한잔 하고 그래요. 아빠랑 마시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시집갈 때가 되니까 그렇네요. 만나면 가게 운영하는 이야기, 결혼식 준비하는 이야기를 하곤 하죠. 결혼하면 아빠랑 할머니 두 분만 사셔야 하는데, 가끔 그게 제 마음 한편을 무겁게 해요.
살아있어 즐기는 술 한잔의 미덕
제 삶이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주와 맥주, 막걸리를 유달리 좋아하고, 사람과 여행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죠. 가장 좋을 때는 새로운 여행지에 가서 새로운 사람과 술을 마실 때고요. 하하. 어떨 땐 행복이란 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건가 싶어요. 그냥 사람들을 만나고, 아픈 일을 겪고, 기쁜 일을 겪으며, 저에게 주어진 것들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 살아있는 것 자체로,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가게 테이블에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앉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은 정말 모두가 친구가 되죠. 이런 게 정말 좋지 않나요?
겪어야 할 일이라면 겪고, 그렇지 못하다면 ‘야, 맥주 한잔하자!’ 하는 것. 그게 사는 재미죠.
살다 보면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이 가슴에 켜켜이 쌓이곤 합니다. 그럴 때는 ‘한잔하자!’하고 불러낸 친구와 술집에 마주 앉아 시시콜콜 어깨 비비며 속내를 털어놓는 것도 행복이라고 한혜령 님은 말합니다. 비가 와서 한 잔, 님이 와서 한 잔, 여기저기서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술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고 싶은 옛 친구가 문득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