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재단하는 여자, 김소령의 행복은 줄자다

이야기를 재단하는 여자, 김소령의 행복은 줄자다
지난 2년, 1만 명이 사용한 ‘옷장’이 있습니다. 깔끔한 정장이 애타게 필요한 그 날, 누구나 이 옷장 문만 열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다급한 누군가를 위한 솜씨 좋은 재단사와 스텝들의 정성스런 도움 덕분이죠. 바로 사회적 기업 ‘열린옷장’의 이야기입니다. 기부받은 귀한 정장을 깨끗이 손질한 뒤, 청년 구직자들을 비롯해 정장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대여해주는 그곳. 열린옷장의 김소령 님을 만났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한 꿈

 
 
아이디어를 처음 낸 건 2011년 11월이에요. 당시 저는 광고계에 있었고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함을 달고 20년째 일하고 있었죠. 그러다 문득 내 인생을 좀 더 행복하고 의미 있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광고 일도 시대의 트렌드를 읽어갈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는데, 이젠 시대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전처럼 4대 매체의 파워도 크지 않고요.
 
그렇게 고민하다 보면 언제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기업에 시선이 머물렀어요. 그 일이 참 가치 있어 보였죠. 그래서 직장 다니면서 관련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한 거예요. 주말마다 단체를 찾아다니며 경험도 쌓았고요. 그 와중에 ‘희망제작소’에서 사회적 기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참가했었는데, 그때 발표했던 아이디어가 지금의 ‘열린옷장’이에요.
 
김소령 님
 

3천 원짜리 줄자로 재는 무한한 꿈의 치수

 
 
초반의 ‘열린옷장’은 청년 구직자들을 위해 기증받은 정장을 대여해주는 공간이었거든요. 그런데 문을 열고 보니까 70%가 청년 구직자면 30% 정도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장이 필요하신 분들이었어요. 자식 결혼을 앞둔 노년층, 재취업을 앞둔 중장년층도 있었죠. 저도 수트 전문가는 아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옷을 공들여 골라주는 게 정말 재밌어요. 워낙 패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잘 맞아 떨어진 거죠. 하하.
 
그래서 이 줄자를 하루 종일 목에 걸고 다녀요. 뭐 삼사천 원 하는 물건이지만 요즘 제가 들고 다니는 건 정말 이것뿐이에요. 처음에 샀던 줄자는 숫자가 다 닳아서 새로 하나 장만했죠. 정장은 사이즈를 정확히 재야 멋이 나는 옷이거든요. 그래서 치수 재는 법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배웠어요. 저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함께 맞춤 양복 제작하시는 분들, 디자이너들, 세탁소까지 찾아다니며 양복 다루는 법을 배웠어요. 최근에는 수트 디자이너도 한 분 채용했고요.
 
김소령 님
 

옷장 문을 닫으면 찾아오는 행복한 ‘편지 정산’ 시간

 
 
아침 아홉시 반에 문 을 열고 저녁 아홉 시쯤 정리가 끝나니까, 노동 시간이 많은 편이죠. 그런데 일이 재밌어서 그럴 수밖에 없어요. 워낙 다양한 분들이 오시거든요. 옷마다 이야기가 남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놨는데, 그중의 하나가 기부자와 기증자가 간단한 편지를 남기도록 한 거에요. 그 편지가 약 1만 장에 가까워요. 보통 기업이 문을 닫고 그 날의 수익을 정산한다면, 저는 ‘편지’를 정산한다고 표현하는데요. 도란도란 둘러앉아서 담당했던 사람들이 보낸 편지를 읽고 공유하는 거죠.
 
어떤 분은 인천공항에서 VIP 라운지 매니저를 오래 하셨대요. 그런데 스노보드를 타다가 사고가 나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이제 더이상 공항을 훨훨 날 수 없으니, 누군가 내 옷을 입고 대신 훨훨 날아다니라’는 편지와 함께, 20벌이나 되는 양복을 모두 보내주셨어요. 또, 남편이 20년 넘게 새벽 6시마다 출근하셨는데, 성실함 만큼은 최고이니 입는 분께 그 기운을 전달하고 싶다고 보내신 아내 분도 계시고요. 저는 제 명함에 ‘스토리 테일러(Story Tailor)’ 라는 직함을 써서 다니거든요. 요즘은 ‘이 수많은 편지를 관리하는 라이브러리를 만들까’ 그걸 연구하고 있어요.
 
열린옷장에 온 편지
 

1만 명의 ‘중요한 날’과 함께 해온 공간

 
 
뜻이 맞는 직원 세 명이서 시작했는데 2년이 지나니까 열 명으로 불어났어요. 그동안 1만 명이 넘는 분들이 여기서 정장을 대여하셨고요. 그 덕에 면접에 합격하고 큰일을 잘 치렀다는 감사편지도 정말 많이 받았죠. 앞으로 열린 옷장을 활용하는 방법을 여러모로 생각 중이에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려고 많은 방향으로 노력 중이죠.
 
항상 살면서 생각하는 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거든요. 광고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이제는 양복 전문가가 돼야 하는데, 오랜만에 사회 초년병으로 다시 돌아와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앞으로 더 이 분야를 공부하고 잘 알아가는 게 목표죠. 비영리단체라고 해서 직원 모두가 가난하게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선 저희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고, 그 행복한 기운을 여기 찾아오는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게 바람이에요.
 
열린옷장

정장을 공유하는 단체이기 전에
응원을 공유하는 단체가 되고 싶어요.

 
옷장 저편 책꽂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사람들의 손편지가 참 정갈합니다. 옷 한 벌에 깃든 추억과 사연이 이토록 애틋할 수 있다니 놀랍기도 합니다. 얼굴 모를 타인에게 내 귀한 정장을 내준 덕에, 어떤 이는 오디션에 합격하고, 어떤 이는 귀향길 내내 자부심으로 가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마움이 담긴 정성스런 편지를 받는 기분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응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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