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맥주 한 잔

5년 전쯤 저는 운영하던 회사를 접고 실의에 빠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법적 절차를 거치느라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친데다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말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집에 있던 어느 주말, 딸 아이가 친구네 집엘 놀러간다 합니다. 지하철로 20분 정도 가야 하는 친구네 집. 예전 같으면 아빠가 차로 데려다줬겠지만 아빠는 직원들 급여를 해결하느라 차를 팔아 버려 데려다 줄 수 없었습니다. 딸 아이는 지하철 타고 간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혼자 지하철에 태울 순 없었습니다. 아내가 따라 나섰지요. 그 때부터 그냥 짜증이 났습니다.
 
서너 시간 흘렀을까. 딸 아이가 아주 신난 목소리로 전화했습니다. “아빠, 유리 아빠가 차로 데려다 주신대요. 걱정 마세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딸 아이가 편하게 올 수 있어서 좋은데, 화낼 이유가 없는데, 괜히 화가 났습니다. “그냥 지하철 타고 돌아와!”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삼사십분쯤 지나 아내와 딸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지른 탓인지 딸 아이는 말이 없고 아내도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내 상태가 어떤 줄 알면서, 차를 얻어타고 오겠다고 전화를 하게 만들어?” 아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음이 불편한 줄 아는 아내는 대꾸하지 않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 모습에 괜히 또 화가 나서, “도대체 이 집에선 나를 배려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거야” 내뱉으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너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 아빠가 그저 태워주는 것 뿐이었는데, 도대체 난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 차 없는 게 그렇게도 창피하고 자존심 상했던 걸까. 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스스로 난 왜 이렇게 작아지는 걸까. 후회와 함께 미안함이 밀려 왔습니다.
 
아내에게 말을 걸자니 입이 안 떨어져, 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딸, 아빠랑 맥주 한 잔 먹으러 가지 않을래?” 그런데 아빠가 소리지르며 난리칠 동안 그저 말없이 앉아있기만 하던 녀석이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합니다.
 
“아빠가 힘든 거 알아요. 그래서 아빠랑 정말로 맥주 한 잔 먹고 싶어요. 하지만 난 아직 어려서 맥주를 먹을 수는 없잖아요.” 우는 딸 아이를 보며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딸 아이는 이렇게 아빠를 생각하는데, 아빠는 그저 자기 힘들다고 딸 아이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던 겁니다.
 
셋이서 집 근처 호프집엘 갔습니다. 생맥주와 치킨을 시켰고요. 얼마 만에 마시는 맥주인지. 시원했습니다. 문득 장난기가 돌았습니다.
 
“괜찮아, 한 잔 먹어봐” 처음엔 질색하던 딸 아이가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는지 맥주잔을 받아 들곤 입에 대고 마시는 척 합니다. “아빠 이거 사진 한 장 찍어. 마실 순 없지만 내가 이 정도 서비스는 할 수 있지.”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때 찍은 사진은 사라졌고, 딸 아이는 벌써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설정샷입니다! ^^

 
 
사진을 보니 이 녀석 진짜로 맥주를 마신 듯 입가에 거품이 묻었습니다. 오랫만에 모두가 웃었습니다. 그 날 마셨던 맥주는, 동네 호프집의 아주 평범한 맥주였지만 제가 마셨던 그 어떤 맥주 보다도 맛있는 한 잔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사업을 잃었고 차도 잃었고, 적잖은 돈도 잃었지만 적어도 집은 잃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가족도 옆에 있었고요. 힘들면 잠깐 눕자. 그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면 되는 거잖아,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곧 딸 아이와 함께 진짜로 맥주 한 잔 할 날이 오겠지요. 역시 설정샷! ^^

 
 
그 날 맥주잔을 입에 댄 아이의 사진을 컴퓨터에 받아 놓고, 저는 그 사진에 제목을 붙였습니다. ‘조기교육’이라고요. 지금 그 사진은 어디 갔는지 찾을 길 없지만, 그 때 기억은 여전히 가슴 속에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딸 아이가 커서 진짜 맥주를 마실 나이가 되면 그 때 얘기를 꺼낼 수 있겠지요. 그땐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때 너와 함께 마신 맥주가 아빠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맥주’ 한 잔이었다고…
 
 

김형덕, 블로거 레이
– www.raytopia.net 운영자
– 아빠로서, 블로거로서 즐겁게 세상 사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 아저씨 블로거. 블로그 내내 딸 자랑이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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