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고 즐거운 우리의 활. 권오정 궁장 이수자

 

남산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길 한켠에 기와가 얹힌 멋들어진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석호정(石虎亭)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곳은 오래된 전통 활터인데요. 국궁은 유교의 육예(六藝)*중 ‘사(射)’에 해당할 만큼 많은 이들이 갈고 닦는 대중적 기예였으나, 요즘에는 양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옛 문화가 되었습니다. 소중한 우리 문화가 잊히지 않도록 전통활을 만들고, 국궁의 매력을 전파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3호 궁장 이수자, 권오정님을 소개합니다.

 

*육예(六藝)*: 고대 교육의 여섯 가지 과목,. 예(禮: 예의),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말타기), 서(書: 글쓰기), 수(數: 수학)를 이름 (출처: 한국고전용어사전)

 

 

우리 활을 만드는 장인의 길을 걷다

 

궁장(弓匠)이란 ‘활을 만드는 장인’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활을 만드는 장인으로, 권오정 궁장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3호 궁장 이수자입니다. 아버지인 권무석 궁장의 뒤를 이어 13대째 전통 활을 만들어 맥을 잇고 있습니다.

 

권무석 궁장의 결혼사진. 동그라미 속 인물들은 권무석 궁장을 비롯한 안동권씨 추밀공파의 궁장들(좌)
/ 권무석 궁장과 그의 활 제작 스승이자 형인 권영호 궁장(우)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 온 가업인 만큼 어린시절부터 전통활이나 활터와 가까웠지만, 권오정 궁장이 궁장 이수자로 발길을 내딛은 데에는 전통을 지키고 가업을 잇는다는 특별한 사명감이나 책임감보다는 아버지를 돕기 위함이 더 컸다고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비롯해 많은 고생 속에서 힘겹게 가업을 잇는 아버지를 돕다 보니 어느새 아버지를 돕는 것을 넘어 같은 길을 걷게 되었고,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책임감도 뒤따랐다고 합니다.

 

권무석 궁장의 활 제작 모습

 

하지만 궁장 이수자로서 전통을 잇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하는데요. 특히 우리나라 전통활의 주재료인 물소뿔을 구하기 위해 중국에서 물소뿔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세관에서 밀수업자라는 오해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검찰과 법원을 오가는 등 많은 난관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장인의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 온 권오정 궁장. 이제는 한미정상회담이나 한UAE정상회담 등에서 국빈을 대접하기 위한 대통령 교환선물을 만드는 등 자신의 길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통 활 제작은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일을 한다는 점 외에 우리만의 높은 기술력과 미에 대한 철학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활이라는 게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해 온 것이고, 그만큼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 오랜 기술들이 깊게 배어 있거든요.”

 

 

여유로움 가득한 ‘활 내는’ 사람들

 

최근 권 궁장은 전통 활 제작 뿐 아니라 국궁의 대중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궁은 과녁까지의 거리가 양궁의 2배에 달하는 145m나 되기 때문에 본래는 강한 힘과 넓은 활터가 필요한데요. 권 궁장은 장소에 제약 없이 누구나 가볍고 즐겁게 국궁을 즐길 수 있도록 실내 활터인 ‘활터 권오정’을 만들어 전통 활쏘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권 궁장은 지역 스포츠센터 강의나 대학교 활쏘기 동아리 무료 강습과 서울시궁도협회 등 국궁 관련 기관에서 이사로 활동하는 등 활쏘기 보급을 위해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궁의 보급에 힘쓰는 이유에는 우리 전통을 알리고 이어간다는 점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활 쏘기가 건강하고 즐거운 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하는데요.

 

 

“활을 배우는 분들이 활쏘기를 통해 즐겁고 행복해 할 때 저 역시 행복을 느낍니다. 간혹 교육생분들 중에서 활에 푹 빠져서 자려고 누우면 천장이 과녁으로 보인다거나, 핸드폰 화면만 봐도 과녁처럼 느껴져서 활쏘기가 너무 하고 싶다고 말해주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너무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남산에 위치한 전통 활터 ‘석호정’의 풍경(좌) / 활을 내는 권오정 궁장

 

그렇다면 국궁의 매력이 무엇일까요? 권 궁장은 ‘여유로움’을 핵심 키워드로 꼽았습니다. 국궁은 과녁을 맞추는 것 외에도 자세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과 같은 활을 쏘기 위한 과정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활 쏘기를 하시는 분들은 ‘활을 쏘러 간다’고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활을 내러간다’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지요. 개인적으로 ‘활을 낸다’는 표현은 ‘활을 쏘고 맞춘다’는 말보다 활을 쏘는 그 과정 자체를 여유롭게 즐긴다는 뉘앙스가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활터에서 있었던 어느 노년의 궁사와의 만남도 활을 통해 얻는 여유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때 잠자리채를 사서 집에 돌아와 신나게 곤충들을 잡았어요. 당시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황학정이라는 곳에 살았었는데, 산 근처였기 때문에 잠자리와 나비가 참 많았고, 그날 유달리 예쁜 노란 나비를 잡았습니다. 2천원을 쥐여 주시며 나비를 당신께 팔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고, 저는 냉큼 나비를 건네드렸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 궁사께서는 건네 받은 나비를 하늘로 바로 날려버리셨죠. 30년도 넘은 먼 옛날의 일이 되었는데도 지금도 그 분께서 나비를 날리며 짓던 표정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웃음기가 있는 듯 없는 듯, 알 듯 말 듯한 그 평화롭던 그 모습이요.”

 

어렵게 잡은 나비를 단번에 날려 보내면서도 평온하게 미소 짓던 노궁사의 모습은 어린 권 궁장의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았다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어 보니 그 때 그 노궁사의 모습은 자연과 어우러진 고즈넉한 활터에서 활에 집중했던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의 태도로 배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활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향해

 

이제 권오정 궁장의 목표는 활 제작의 명맥 잇기와 더불어 새로운 활쏘기 문화를 보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 몇년간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셔서 활 제작을 거의 하지 못했는데요. 활 제작공방을 만들어서 전통활을 제작하고, 활 제작을 가르치는 일을 조만간 시작하려 합니다. 또 국궁의 대중화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있는 TAC(전통활쏘기클럽)와 함께 한국의 활쏘기 문화를 개선하고 게임화해서 새로운 활쏘기 문화를 보급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에도 보급하는 큰 그림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활을 쏘는 모든 이들이 여유롭게 활쏘기를 즐기면서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권오정 궁장. 활터의 궁사처럼 여유롭게, 또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권오정 궁장이 만들어 나갈 새로운 활쏘기 문화가 기대되는 바입니다. 미디어SK 독자 여러분도 따뜻한 봄이 오면 활터에 한 번 나가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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