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로 전국이 흠뻑 젖어있던 날, 강동현 차장을 만나러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촬영을 위해 급하게 그렸다는 그림 한 장. 연필 한 자루로 상대방의 영혼까지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가벼운 손놀림 몇 번으로 흰 도화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의 마술 같은 그림 이야기, 지금부터 들어볼까요?
Q.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나요?
저는 주로 초상화를 그려요. 정식으로 그림을 그린 건 아들을 낳고부터니까 13년 전부터네요. 그때는 디지털카메라도 없었고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이의 모습을 촬영하고 바로 확인을 할 수가 없어서 좀 아쉽더라고요. 사실 예전부터 사람 얼굴 그리는데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제 아들을 모델 삼아 그리기 시작했죠. 아이가 커가는 예쁜 모습을 남겨두기 위해서…
Q. 그 뒤로 쭉 그림을 그리신 건가요?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있잖아요. 나만의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게 그림이었던 것 같아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어디서든 그릴 수 있으니까 편하더라고요. 그렇게 조금씩 그리다가 양로원에 봉사활동을 갔어요. 어르신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드린다고 했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초상화 한 점을 그리려면 2~3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한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게 쉬운 게 아닌데도, 할머니 자신이 주인공이 됐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으셨나 봐요. 내 재능을 살려 상대방에게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줄 수 있다는 게 참 매력적이더라고요. 덕분에 나름대로 즐거운 의무감도 생겼어요. “내 그림으로 상대방을 즐겁게 해줘야겠다.”, “좀 더 잘 그려보자.”라는 생각도 들고, 그때부터 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Q. 그림을 배우셨나요?
따로 공부한 적은 없고, 그냥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있어서 미술 시간에 친구들보다 표현력이 조금 뛰어났다는 생각은 해요. 하하. 그저 손이 가는 대로 그린 거죠. 그림에 어려운 점이라기보단 딜레마는 있었어요.
보통 머리숱이 없는 분은 숱을 많이 그려달라고 하고, 주름이 많은 분은 주름을 없애달라고 하니, 고민이 되죠. 그런 특징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건데, 그걸 없애달라고 하면 흥미가 없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느낌을 살려 그리고 싶고, 그림을 받는 사람은 좀 더 예쁘게 그림에 담기길 원하니까… 처음엔 그런 것에 대한 딜레마가 있었죠.
Q. 초상화를 그릴 때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나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림에 이런저런 요구를 많이 했어요. ‘그림이 나를 안 닮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사실 그런 사람들의 포커스는 ‘좀 더 예쁘게’거든요.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떠나서 자신이 예쁘게 담겨야 하는 거죠. 처음엔 저도 그런 점에 포커스를 맞춰서 연필 선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사진처럼 문질러서 그렸어요. 그 기법이 사람을 더 예뻐 보이게 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너무 갑갑하더라고요. 나도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그려주는 건데, 내 느낌이 전혀 가미되지 않으니까요. 사진과 똑같이 그릴 거면 차라리 사진을 찍어 주지, 굳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사진 같지 않은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하고, 선 자국이 그대로 남으면서 되도록 지우개를 쓰지 않는 그런 형태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내 스타일을 잡은 것 같아요. 배우지는 않았지만 오래 그리다 보니 나만의 노하우가 생겼어요. 제 나름의 화풍 말이에요.
Q. 팀원들에게 초상화를 많이 그려줬다고 하던데요?
올해로 제가 입사한 지 만 5년 6개월입니다. 그전에는 서울의 다른 회사에서 13년 정도 근무하다가, 고향인 부산으로 이직했어요. 입사 후 팀원들과 친해질 기회를 만들기 위해 팀원들에게 그림을 그려줬더니 굉장히 놀라면서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그림을 그려서 팀원들에게 줬다는 소문이 나니까, 다음 사람도 은근히 기대하고요. 취미이지만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Q. 그림을 그리는 것이 업무에 도움이 될 때가 있나요?
아무것도 없는 흰 도화지에 그림 하나를 그린다는 것 자체가 창의적인 활동이잖아요. 그런 활동을 꾸준히 하니까 아무래도 도움이 되죠. 특히 순간적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수채화는 미리 순서부터 생각해둬야 해요.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제대로 낼 수 있거든요. 업무를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건 미술을 하면서 얻은 좋은 습관이죠.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거창한 건 없고, 초상화가 100점 정도 되면 회사 휴게실에 작은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이에요. 사실은 슬럼프가 와서 한동안 그림을 안 그렸어요. 이젠 슬럼프에서 벗어나 다시 그림을 그려보려고요. 새로운 구성원도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 친구들과 교감하면서 그림도 그려주고, 저 스스로도 실력을 발전시키고 싶어요.
강동현 차장이 직접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기억을 남기기’라는 폴더가 있습니다. 그가 그린 다양한 작품을 보니, 그의 손과 눈을 거쳐 간 사람이 참으로 여럿입니다. 폴더 이름처럼, 그림을 통해 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사람들. 앞으로도 더 많은 주인공이 탄생하길 기대해 봅니다.